2014년 1분기를 지나오면서 무한도전은 위기설에 시달려야 했다. 예전만큼의 예능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우려와 질타였다. 나도 이 의견에 동의했던 사람이다. 확실히 무한도전의 예능성은 예전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데다 예능이 다양해지면서 무한도전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생각도 가졌었다. 그리고 많이 지쳐 보이는 무한도전 멤버들까지.


하지만 확실히 무한도전은 무한도전인가 보다. 무한도전을 단순한 예능으로서만 본다면 분명 위기는 맞다. 하지만 무한도전이 단순한 예능 이상의 의미를 전달해준다는 것을 나는 잊고 있었다. 과거 무한도전은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통해서 사람들이 잊고 있던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는 그런 예능이었다. 비인기 스포츠 종목을 알리기 위한 다양한 프로젝트가 그중 하나가 될 수 있겠다. 무한도전은 이런 것들을 통해서 사람들이 외면하거나 잊고 있던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


이번 무도 선택 2014 역시 마찬가지다. 도대체 어느 예능에서 이런 것을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정치와 선거의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하고 꼬집어 무겁고 거북하게 느껴지던 정치를 가볍게 환기하고 나아가 투표를 독려하기까지 하는 이런 예능. 정말 무도니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무도가 앞으로도 이런 모습을 오래 보여주었으면 좋겠다(김태호PD가 알아서 잘하겠지.). 좀 덜 웃겨도, 시청률이 떨어져도, 무도를 응원하고 지지한다. 무도 짱.

Posted by hon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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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친구 녀석이 이런 카톡을 보내왔다. "나진 오늘 경기를 보니 리빌딩이 나름 괜찮은 것 같은데?" 아마 블레이즈와의 마스터즈 경기를 본 것 같다. 보지는 못했으나, 경기 결과는 나진의 승리.


친구놈이 괜찮다고 한 것은 경기력이었을 것이다. 리빌딩 이전의 나진소드의 경기력은 분명 하락세였다. 그리고 분명 리빌딩이 필요한 시점이 온 것도 맞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진소드의 리빌딩은 뭔가 안타깝고 아쉽다. 너무너무.




아 그리운 나진 소드여!..


나진 소드가 나진 소드인 이유.


나진 소드가 왜 나진 소드인가. 왜 나진 소드가 CJ팀과 더불어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는가. 그 요인에는 바로 저 선수들이 있었다. 특히나 나진 소드에 막눈(윤하운)이라는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진소드의 전성기 시절에도 경기력의 논란은 있었으나, 나진 소드는 소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말 화끈한 경기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저 막눈이 있었다. 지금이야 탑이라는 포지션 자체가 팀을 지탱해주는 탱커로서 역할이 상당히 제한되고 있는 실정이지만, 나진 소드가 활약할 당시의 시즌2와 시즌3에만 해도 탑이 하드캐리하는 그림이 종종 나오곤 했다. 그래서 탄생한 스타가 플레임, 샤이, 막눈이었고.


막눈은 플레임과 샤이보다 더 공격적인 스타일의 탑 유저였다. 그리고 그는 항상 경기에서 캐리를 하려는 욕심을 부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의 욕심은 다이브로 나타났다. 과감하게 적진에 파고들어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즐겁게 했다. 물론 그게 때로는 독이 되고, 패배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떄문에 '나진 소드'라고 하면 언제나 공격적인 플레이를 지향하는 팀. 다이브를 즐기는 팀으로 각인되었다. 나진 소드가 공격적이지 않으면 그건 나진 소드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나진 소드를 만든 것은 다름아닌 저 5명의 게이머였다.



팀의 간판 스타 대접이 그 팀의 명성을 좌우한다.


이랬던 나진 소드가 2013년 여름을 기점으로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팀의 간판인 막눈이 계약 만료로 나진 소드를 나가게 된다. 2013 스프링 시즌의 부진에 대해 여러 말이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막눈이 팀을 나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진이 재계약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곧 나진 소드와 다름없었으니까.


지금도 의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막눈과 나진을 갈라서게 한 것인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진에게 이는 상당한 도박이었다는 점이다. 팀의 인기와 실력, 그 모든 것을 따져보아도 당시의 막눈을 대체할 만한 게이머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실상 소드의 탑을 새로 키우는 것과 다름없는 결정이었던 것이다. 이 결정 이후 나진 소드는 계속된 내리막의 길을 걷는다. 물론 NLB와 중간에 나간 롤드컵에서는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과거의 명성을 생각하면 성적과 팀컬러 모두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진 소드의 팬들은 나진을 응원해왔다. 성적이 부진하더라도 나진 소드를 대표하고 있는 선수들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의 대대적인 리빌딩에 나진 소드 팬 대부분은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축구팀에서도 그 팀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선수가 있으면 레전드로 대접을 해준다. 그 선수의 경기력이 떨어져도 쉽게 선수를 팔거나 팀에서 내보내지 않으며, 은퇴할 때엔 레전드로서의 대접을 해준다. 그런데 이번 나진의 리빌딩은 막눈과 재계약을 하지 않을 때보다 더한 처사였다. 시즌 도중에 리빌딩을 발표하고, 그 명단까지 공개해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한 것이다. 나진의 선수들을 응원하는 팬과 지금의 나진 소드를 만들어낸 선수들을 생각한다면 이럴 수 있을까? NLB결승전을 치러야 했던 선수들이 그 경기가 자신의 마지막 경기라는 것을 확정받고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다.


E스포츠 역시 성적으로 말하는 경기다.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성적이 안 나오는 팀이 계속된 인기를 구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성적만이 그 팀의 인기를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CJ프로스트와 블레이즈가 과거보다 성적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대다수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에는 원년 멤버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단순히 성적이라는 것으로 평가할 수 없는 요소가 그들에게 있다. 압도적인 서포터 실력을 통해 신이라 불리는 메드라이프, 팀원 모두가 잘생긴 외모로 인기를 구가했던 블레이즈와 여전히 그 팀의 얼굴을 담당하는 플레임. 다이브로 유명했던 막눈과 도도리아 프레이. 이들 모두가 단순히 게임을 잘하는 것을 넘어 롤이라는 대회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팬들은 이 아이콘을 따라 움직인다.


실력을 대체할 만한 선수가 많다고 해서 선수들을 존중하지 않고 내치는 프로게이머단의 처사는 팬들을 화나게 하고 E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꺾는 계기가 된다. 선수단의 변경에 대한 그들의 권한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겠으나, 팬들과 선수들을 생각한다면 좀 더 신중한 결정과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굿바이 나진 소드.

Posted by hon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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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한 친구A와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오랜만에 종교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대학교의 선교단체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대학생활을 보내던 독실한 친구B놈이 졸업을 하고 나자 극심한 회의감에 빠졌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친구B가 회의감에 빠진 이유가 궁금했다. 친구A놈은 말했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교회에 가면 하나님을 만났다는 간증으로 넘쳐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간증에 박수를 치고 감동을 하는 광경을 교회에서는 자연스레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그런 교회의 간증에 익숙해진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착각에 빠지곤 한다. 너도 만났고, 나도 만났고. 그러니 너도 만날 테지.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예컨대 불신자가 기독교인에게 '당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나에게도 보여줄 수 있나요?'라고 물으면 그 기독교인은 어떻게 대처할까? 아마 100이면 100 이렇게 답할 것이다. 교회에 다니세요. 성경을 보세요. 기도하세요. 정말 이것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있다는 기독교인들의 대답에 나는 친구B놈을 반례로 제시할 수 있다.


많은 교회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이런 것을 했음에도 만나지 못했다면, 노력과 간절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말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너무 주관적이다. 내가 볼 때 친구B놈은 단언컨대 어떤 기독교인보다도 성경을 열심히 읽었고, 기도했고, 교회와 공동체에 헌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친구A는 몇 년 전부터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다. 신앙생활로 하는 것이라곤 집에서 성경 좀 보고, 기도 좀 하는 것이 전부가 된 녀석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하나님을 만났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너는 네가 만난 하나님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친구는 어떻게 하면 증명이 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네가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도 경험할 수 있으면 증명이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잠깐 철학적인 이야기이지만, 개인의 경험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내가 경험한 것을 통해 느끼는 감정과 믿음은 누구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예컨대 내가 스마트폰을 보면서 '이것은 컴퓨터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누구도 여기에 반박할 수 없다. 내가 경험한 것을 토대로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누가 거기에 터치를 할 수 있는가? 아무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 생각을 하나의 사실이나 지식으로 증명할 경우 문제가 일어난다. 스마트폰을 보며 '이것은 컴퓨터다.'라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장하고 이것을 사실로 내세울 경우 이를 정당화할 근거가 있어야 한다. 컴퓨터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징이라든지, 속성이라든지 뭐 그런. 그리고 그것이 정당화되고 받아들여지면 주장은 하나의 사실과 지식이 된다.


지루한 소리를 좀 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저 정당화다. 신을 경험했다는 친구의 주장을 정당화할 근거를 보여주었으면 했다. 그가 신을 경험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까지 내가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나 지식이 되려면 정당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친구A는 그것을 할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친구의 주장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친구A)을 통해 나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나와 바로 관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의 경험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직접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친구의 주장이 실존철학의 시초라고도 불리는 키에르케고르의 주장과 많이 닮아있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신과 만나는 '단독자'라는 주장을 통해 교회의 교리나 기독교 윤리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이 아닌 직접 신과 대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주장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직접적 만남에는 '감성'이든, '이성'이든 그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다. 완전히 발가벗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답답해진다.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은 알겠다. 교회의 그 어떤 요소도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겠다. 그럼 인간은 신을 만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1.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2. 무슨 짓이든 해본다.


사실 1번이든 2번이든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의 주장도 인간의 입장에서 의미가 있지, 저 신이 없다면 말짱 꽝이다. 


좀 억지를 부려 친구A와 B를 저 1, 2로 나눠보자면, 친구B는 거의 2에 가깝게 행동했고, 친구A는 거의 1에 가깝게 행동했음에도 친구B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며, 친구A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한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한 가지 사실은 지극히 종교가 사적이고 개인적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무한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으나, 누구에게는 정말 손톱만큼도 의미가 없는 게 바로 종교이고 신이다. 그리고 이를 구분 짓게 하는 것은 바로 저 믿음이다. 증명되지 않는 믿음. 믿음이라는 속성 자체가 사적이기 때문에 증명을 요구받지 않는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래서 종교는 사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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