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한 친구A와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오랜만에 종교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대학교의 선교단체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대학생활을 보내던 독실한 친구B놈이 졸업을 하고 나자 극심한 회의감에 빠졌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친구B가 회의감에 빠진 이유가 궁금했다. 친구A놈은 말했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교회에 가면 하나님을 만났다는 간증으로 넘쳐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간증에 박수를 치고 감동을 하는 광경을 교회에서는 자연스레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그런 교회의 간증에 익숙해진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착각에 빠지곤 한다. 너도 만났고, 나도 만났고. 그러니 너도 만날 테지.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예컨대 불신자가 기독교인에게 '당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나에게도 보여줄 수 있나요?'라고 물으면 그 기독교인은 어떻게 대처할까? 아마 100이면 100 이렇게 답할 것이다. 교회에 다니세요. 성경을 보세요. 기도하세요. 정말 이것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있다는 기독교인들의 대답에 나는 친구B놈을 반례로 제시할 수 있다.


많은 교회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이런 것을 했음에도 만나지 못했다면, 노력과 간절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말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너무 주관적이다. 내가 볼 때 친구B놈은 단언컨대 어떤 기독교인보다도 성경을 열심히 읽었고, 기도했고, 교회와 공동체에 헌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친구A는 몇 년 전부터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다. 신앙생활로 하는 것이라곤 집에서 성경 좀 보고, 기도 좀 하는 것이 전부가 된 녀석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하나님을 만났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너는 네가 만난 하나님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친구는 어떻게 하면 증명이 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네가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도 경험할 수 있으면 증명이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잠깐 철학적인 이야기이지만, 개인의 경험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내가 경험한 것을 통해 느끼는 감정과 믿음은 누구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예컨대 내가 스마트폰을 보면서 '이것은 컴퓨터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누구도 여기에 반박할 수 없다. 내가 경험한 것을 토대로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누가 거기에 터치를 할 수 있는가? 아무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 생각을 하나의 사실이나 지식으로 증명할 경우 문제가 일어난다. 스마트폰을 보며 '이것은 컴퓨터다.'라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장하고 이것을 사실로 내세울 경우 이를 정당화할 근거가 있어야 한다. 컴퓨터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징이라든지, 속성이라든지 뭐 그런. 그리고 그것이 정당화되고 받아들여지면 주장은 하나의 사실과 지식이 된다.


지루한 소리를 좀 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저 정당화다. 신을 경험했다는 친구의 주장을 정당화할 근거를 보여주었으면 했다. 그가 신을 경험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까지 내가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나 지식이 되려면 정당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친구A는 그것을 할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친구의 주장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친구A)을 통해 나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나와 바로 관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의 경험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직접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친구의 주장이 실존철학의 시초라고도 불리는 키에르케고르의 주장과 많이 닮아있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신과 만나는 '단독자'라는 주장을 통해 교회의 교리나 기독교 윤리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이 아닌 직접 신과 대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주장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직접적 만남에는 '감성'이든, '이성'이든 그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다. 완전히 발가벗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답답해진다.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은 알겠다. 교회의 그 어떤 요소도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겠다. 그럼 인간은 신을 만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1.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2. 무슨 짓이든 해본다.


사실 1번이든 2번이든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의 주장도 인간의 입장에서 의미가 있지, 저 신이 없다면 말짱 꽝이다. 


좀 억지를 부려 친구A와 B를 저 1, 2로 나눠보자면, 친구B는 거의 2에 가깝게 행동했고, 친구A는 거의 1에 가깝게 행동했음에도 친구B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며, 친구A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한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한 가지 사실은 지극히 종교가 사적이고 개인적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무한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으나, 누구에게는 정말 손톱만큼도 의미가 없는 게 바로 종교이고 신이다. 그리고 이를 구분 짓게 하는 것은 바로 저 믿음이다. 증명되지 않는 믿음. 믿음이라는 속성 자체가 사적이기 때문에 증명을 요구받지 않는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래서 종교는 사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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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on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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