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성

단상/종교 2014. 10. 8. 17:28

교회에서 성이라는 것은 참 다뤄지지 않는 주제이다. 나도 교회를 다녔었지만, 교회에서 성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지 모르겠다. 물론 이성교제 강의라는 뻔한 내용의 이야기들은 가끔 이루어진다. 성인이 되고 대학생활을 막 시작한 청년들에게 단연 이성교제는 최대의 관심사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주기적으로 이성교제와 관련한 강의는 하게 된다. 하지만 몇 년 그 강의를 듣고 나면 바보라도 알게 된다. 기독교가 성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말이다.


3말4초라는 말을 아는가? 사실 이 용어가 종교단체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지만, 특정 종교단체에서는 굉장히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3말4초. 즉, 3학년 말에서 4학년 초에 연애를 시작하라는 지침같은 것이다. 왜 굳이 3학년 말에서 4학년 초인가? 그 시기가 그나마 인격적으로 성숙하여 사랑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가 이 시기에 성숙해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저 말은 사실 종교단체가 가지는 이성교제의 생각에 대한 상징적인 단어다. 즉, 성숙할 때 연애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성숙은 사랑할 준비가 된 어느 시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혼과 연결된다. 결국 저 말은 결혼할 준비가 된 사람들만 사랑하라는 어떤 암묵적인 용어다.


이걸 개소리라고 할 신앙인도 있을 수 있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개신교는 결혼 이전의 어떠한 스킨십이나 성관계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장하는 올바른 성관계와 연인의 모습은 오로지 결혼이라는 제도와 하나님의 허락안에서만 완전해진다. 그 외 나머지는 다 음욕이며, 음란이고 죄가 된다. 아 물론 이성교제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연애? 결혼을 전제하지 않고도 분명 가능하다. 하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그 연애속에서 성적인 요소를 제거하라고 압박한다. 결혼을 약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성적인 모든 행위는 죄악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실이다. 누구든 사랑을 하면 연인의 몸을 만지고 싶고 같이 자고 싶다. 허나 교회는 절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현실과의 커다란 괴리가 발생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과 자고싶은 마음은 너무 자연스럽다. 그 사람을 만지고 싶고, 보고 싶고, 냄새맡고 싶고. 이런 마음은 사랑하면 할 수록 점점 커진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죄'라는 이름이 사랑을 하고 있는 신자들을 압박한다. 신자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그리고 누군가는 상대방을 좋아하여 생긴 이런 감정을 철저하게 부정하기도 한다. 자신의 사랑을 더럽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끊어내고자 애쓴다.


그들은 최대한 연애를 미루라고 권한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던가? 같은 공간에서 아픔을 나누고 함께 활동하고 시간을 보내면, 사랑이 싹트고 정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과정속에서 서로의 모든 것을 원하는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허나 그들은 이것이 죄악의 길로 들어가는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도 사랑의 과정에서 서로를 원하는 감정이 섹스로 이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무슨 죄인가? 허나 이 감정이 절정에 다다른 결과가 섹스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연애를 하는 것을 두렵게 한다. 그래서 결국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연애를 일정기간 포기하는 것이다. 시기가 아니라는 말로 말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그게 맘대로 되나?


이런 상황에서 신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없다. 믿음을 포기하든지, 자신의 사랑하는 감정을 어떤식으로든 억누르든지, 아니면 감추고 가든지. 허나 어느 것도 교회에 득이 되지 않는 선택지다.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결국 교회를 떠나는 것이고, 사랑하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자신의 좋아하는 감정을 스스로 왜곡하는 것이며, 사랑하는 현실을 감추는 것은 자신만의 은밀한 영역을 만들어 신앙과 분리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신자의 고통과 수치심을 유발한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공동체는 신자들의 성문제에 대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공간이 되어버린다. 신자들은 자신들의 성을 토로할 수 없다. 결혼이라는 약속이 없는 모든 성에 대해 죄라는 딱지를 붙인 공간은 더 이상 신자들의 성 문제를 보듬어주지 않는다. 거기엔 자비도 관심도 없다. 성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냉정한 심판의 칼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몇일전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사건을 다룬 숨바꼭질이라는 책을 다 읽었다. 숨바꼭질은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사건을 통해 한국교회가 처한 문제의 본질을 끄집어내고자 했다. 책의 분석은 꽤나 날카로웠고 구구절절 맞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책을 읽고 나는 뭔가 빠졌다는 생각을 했다. 그 책은 교회라는 공간이 성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 전병욱 목사의 사건이 지금까지도 해결이 되지 못한 것에는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대처가 없었던 것이 상당히 크다. 피해자들은 목사를 고소하지도 못했고, 주변사람들에게 피해사실을 말하지도 못했다. 오랫동안 아픔과 삶을 나누는 팀원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 문제를 단순히 교회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과 성공한 목회자의 높디높은 권위라는 측면으로만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이 책은 피해자들의 수치심의 측면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끊임없이 성에 대해 거룩함을 강요받은 신자가 교회라는 공간에서 당한 성추행으로 인해 발생한 수치심은 일반적인 성적 수치심보다 그 강도가 더 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성이라는 것 자체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교회의 문화속에서, 그들은 성적인 범죄사실 자체를 누구에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사건은 끝끝내 당사자가 아닌 당사자의 지인과 제 3자에 의해서 드러났다. 당사자들 중 어느누구도 직접적으로 행동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못한 것에는 결혼 이외의 성에 대해 죄악됨으로 취급하는 한국교회의 성 가치관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난 생각한다.


교회가 성적으로 건강해지려면 분명 성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물론 난 이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다. 교회가 미쳐서 성경을 다른 기조로 해석하지 않는 이상, 성에 대한 기독교의 단호함은 앞으로도 계속 될테니까.

Posted by hon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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