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종교'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4.10.08 교회의 성
  2. 2014.05.16 종교는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이다.
  3. 2013.09.09 동성애를 보고 날뛰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2

교회의 성

단상/종교 2014. 10. 8. 17:28

교회에서 성이라는 것은 참 다뤄지지 않는 주제이다. 나도 교회를 다녔었지만, 교회에서 성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지 모르겠다. 물론 이성교제 강의라는 뻔한 내용의 이야기들은 가끔 이루어진다. 성인이 되고 대학생활을 막 시작한 청년들에게 단연 이성교제는 최대의 관심사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주기적으로 이성교제와 관련한 강의는 하게 된다. 하지만 몇 년 그 강의를 듣고 나면 바보라도 알게 된다. 기독교가 성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말이다.


3말4초라는 말을 아는가? 사실 이 용어가 종교단체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지만, 특정 종교단체에서는 굉장히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3말4초. 즉, 3학년 말에서 4학년 초에 연애를 시작하라는 지침같은 것이다. 왜 굳이 3학년 말에서 4학년 초인가? 그 시기가 그나마 인격적으로 성숙하여 사랑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가 이 시기에 성숙해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저 말은 사실 종교단체가 가지는 이성교제의 생각에 대한 상징적인 단어다. 즉, 성숙할 때 연애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성숙은 사랑할 준비가 된 어느 시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혼과 연결된다. 결국 저 말은 결혼할 준비가 된 사람들만 사랑하라는 어떤 암묵적인 용어다.


이걸 개소리라고 할 신앙인도 있을 수 있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개신교는 결혼 이전의 어떠한 스킨십이나 성관계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장하는 올바른 성관계와 연인의 모습은 오로지 결혼이라는 제도와 하나님의 허락안에서만 완전해진다. 그 외 나머지는 다 음욕이며, 음란이고 죄가 된다. 아 물론 이성교제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연애? 결혼을 전제하지 않고도 분명 가능하다. 하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그 연애속에서 성적인 요소를 제거하라고 압박한다. 결혼을 약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성적인 모든 행위는 죄악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실이다. 누구든 사랑을 하면 연인의 몸을 만지고 싶고 같이 자고 싶다. 허나 교회는 절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현실과의 커다란 괴리가 발생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과 자고싶은 마음은 너무 자연스럽다. 그 사람을 만지고 싶고, 보고 싶고, 냄새맡고 싶고. 이런 마음은 사랑하면 할 수록 점점 커진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죄'라는 이름이 사랑을 하고 있는 신자들을 압박한다. 신자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그리고 누군가는 상대방을 좋아하여 생긴 이런 감정을 철저하게 부정하기도 한다. 자신의 사랑을 더럽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끊어내고자 애쓴다.


그들은 최대한 연애를 미루라고 권한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던가? 같은 공간에서 아픔을 나누고 함께 활동하고 시간을 보내면, 사랑이 싹트고 정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과정속에서 서로의 모든 것을 원하는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허나 그들은 이것이 죄악의 길로 들어가는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도 사랑의 과정에서 서로를 원하는 감정이 섹스로 이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무슨 죄인가? 허나 이 감정이 절정에 다다른 결과가 섹스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연애를 하는 것을 두렵게 한다. 그래서 결국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연애를 일정기간 포기하는 것이다. 시기가 아니라는 말로 말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그게 맘대로 되나?


이런 상황에서 신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없다. 믿음을 포기하든지, 자신의 사랑하는 감정을 어떤식으로든 억누르든지, 아니면 감추고 가든지. 허나 어느 것도 교회에 득이 되지 않는 선택지다.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결국 교회를 떠나는 것이고, 사랑하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자신의 좋아하는 감정을 스스로 왜곡하는 것이며, 사랑하는 현실을 감추는 것은 자신만의 은밀한 영역을 만들어 신앙과 분리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신자의 고통과 수치심을 유발한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공동체는 신자들의 성문제에 대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공간이 되어버린다. 신자들은 자신들의 성을 토로할 수 없다. 결혼이라는 약속이 없는 모든 성에 대해 죄라는 딱지를 붙인 공간은 더 이상 신자들의 성 문제를 보듬어주지 않는다. 거기엔 자비도 관심도 없다. 성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냉정한 심판의 칼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몇일전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사건을 다룬 숨바꼭질이라는 책을 다 읽었다. 숨바꼭질은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사건을 통해 한국교회가 처한 문제의 본질을 끄집어내고자 했다. 책의 분석은 꽤나 날카로웠고 구구절절 맞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책을 읽고 나는 뭔가 빠졌다는 생각을 했다. 그 책은 교회라는 공간이 성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 전병욱 목사의 사건이 지금까지도 해결이 되지 못한 것에는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대처가 없었던 것이 상당히 크다. 피해자들은 목사를 고소하지도 못했고, 주변사람들에게 피해사실을 말하지도 못했다. 오랫동안 아픔과 삶을 나누는 팀원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 문제를 단순히 교회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과 성공한 목회자의 높디높은 권위라는 측면으로만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이 책은 피해자들의 수치심의 측면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끊임없이 성에 대해 거룩함을 강요받은 신자가 교회라는 공간에서 당한 성추행으로 인해 발생한 수치심은 일반적인 성적 수치심보다 그 강도가 더 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성이라는 것 자체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교회의 문화속에서, 그들은 성적인 범죄사실 자체를 누구에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사건은 끝끝내 당사자가 아닌 당사자의 지인과 제 3자에 의해서 드러났다. 당사자들 중 어느누구도 직접적으로 행동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못한 것에는 결혼 이외의 성에 대해 죄악됨으로 취급하는 한국교회의 성 가치관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난 생각한다.


교회가 성적으로 건강해지려면 분명 성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물론 난 이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다. 교회가 미쳐서 성경을 다른 기조로 해석하지 않는 이상, 성에 대한 기독교의 단호함은 앞으로도 계속 될테니까.

Posted by hon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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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한 친구A와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오랜만에 종교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대학교의 선교단체 동아리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대학생활을 보내던 독실한 친구B놈이 졸업을 하고 나자 극심한 회의감에 빠졌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친구B가 회의감에 빠진 이유가 궁금했다. 친구A놈은 말했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확신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교회에 가면 하나님을 만났다는 간증으로 넘쳐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간증에 박수를 치고 감동을 하는 광경을 교회에서는 자연스레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그런 교회의 간증에 익숙해진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착각에 빠지곤 한다. 너도 만났고, 나도 만났고. 그러니 너도 만날 테지.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예컨대 불신자가 기독교인에게 '당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나에게도 보여줄 수 있나요?'라고 물으면 그 기독교인은 어떻게 대처할까? 아마 100이면 100 이렇게 답할 것이다. 교회에 다니세요. 성경을 보세요. 기도하세요. 정말 이것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수 있다는 기독교인들의 대답에 나는 친구B놈을 반례로 제시할 수 있다.


많은 교회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보고 기도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이런 것을 했음에도 만나지 못했다면, 노력과 간절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말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그것은 너무 주관적이다. 내가 볼 때 친구B놈은 단언컨대 어떤 기독교인보다도 성경을 열심히 읽었고, 기도했고, 교회와 공동체에 헌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친구A는 몇 년 전부터 교회를 나가지 않고 있다. 신앙생활로 하는 것이라곤 집에서 성경 좀 보고, 기도 좀 하는 것이 전부가 된 녀석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하나님을 만났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너는 네가 만난 하나님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증명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친구는 어떻게 하면 증명이 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네가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도 경험할 수 있으면 증명이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잠깐 철학적인 이야기이지만, 개인의 경험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내가 경험한 것을 통해 느끼는 감정과 믿음은 누구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예컨대 내가 스마트폰을 보면서 '이것은 컴퓨터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누구도 여기에 반박할 수 없다. 내가 경험한 것을 토대로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누가 거기에 터치를 할 수 있는가? 아무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 생각을 하나의 사실이나 지식으로 증명할 경우 문제가 일어난다. 스마트폰을 보며 '이것은 컴퓨터다.'라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장하고 이것을 사실로 내세울 경우 이를 정당화할 근거가 있어야 한다. 컴퓨터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징이라든지, 속성이라든지 뭐 그런. 그리고 그것이 정당화되고 받아들여지면 주장은 하나의 사실과 지식이 된다.


지루한 소리를 좀 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저 정당화다. 신을 경험했다는 친구의 주장을 정당화할 근거를 보여주었으면 했다. 그가 신을 경험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까지 내가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나 지식이 되려면 정당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친구A는 그것을 할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은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게 친구의 주장이었다. 하나님은 자신(친구A)을 통해 나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나와 바로 관계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누구도 하나님의 경험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직접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친구의 주장이 실존철학의 시초라고도 불리는 키에르케고르의 주장과 많이 닮아있다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신과 만나는 '단독자'라는 주장을 통해 교회의 교리나 기독교 윤리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이 아닌 직접 신과 대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주장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직접적 만남에는 '감성'이든, '이성'이든 그 어떤 것도 끼어들 수 없다. 완전히 발가벗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쯤 되면 답답해진다. 존재 그 자체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은 알겠다. 교회의 그 어떤 요소도 직접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겠다. 그럼 인간은 신을 만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1.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2. 무슨 짓이든 해본다.


사실 1번이든 2번이든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의 주장도 인간의 입장에서 의미가 있지, 저 신이 없다면 말짱 꽝이다. 


좀 억지를 부려 친구A와 B를 저 1, 2로 나눠보자면, 친구B는 거의 2에 가깝게 행동했고, 친구A는 거의 1에 가깝게 행동했음에도 친구B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고 말하며, 친구A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한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한 가지 사실은 지극히 종교가 사적이고 개인적이라는 것이다. 누구에게는 무한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으나, 누구에게는 정말 손톱만큼도 의미가 없는 게 바로 종교이고 신이다. 그리고 이를 구분 짓게 하는 것은 바로 저 믿음이다. 증명되지 않는 믿음. 믿음이라는 속성 자체가 사적이기 때문에 증명을 요구받지 않는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래서 종교는 사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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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커밍아웃으로 떠들썩했고 결혼까지 하겠다고 공개 선언을 해서 동성애논란을 불러온 김조광수와 김승환의 결혼식이 청계천에서 있었나보다. 난 뭐 솔직히 그들이 커밍아웃을 하든 결혼을 하든 관심 없다. 어차피 "난 남자를 좋아해" 라든지, 남자와 결혼을 한다든지 이런건 다 개인적인 감정이고 결정일 뿐이니까 말이다. 그런거에 내가 왜 일일히 관심을 가져야하나?


그런데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몇몇 사람들과 더불어 기독교인들은 이 일을 그냥 개인의 감정 또는 결정으로 생각하고 그냥 넘길수 없나보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는 장소에 몇몇 기독교인이 가서 찬양 부르면서 떠들고, 어떤 기독교인은 또 자신의 인분과 된장을 섞은 오물을 투척했단다. 그걸로 모자라서 경찰의 제지를 받고 쫒겨나자 밖에서 사진처럼 피켓들고 시위를 하면서 온갖 저주와 악담을 퍼부었나보다. 사진에 나온 피켓을 보라.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지. 저들의 말대로라면 한 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는데 있어 가장 무서운 무기는 동성애다. 동성애 하나면 나라 망가뜨리는건 일도 아닌게다.


사실 모든 기독교인이 저런건 아니다. 하지만 도저히 해서는 안될 일을 했다고 비판하는 보통의 기독교인 마저도 이번 김조광수와 김승환의 동성애 결혼식에 대해 그냥 저들의 폭력적이고도 무례한 태도와 상식이 없는 행동만을 비판할 뿐, 동성애와 더불어 저들의 결혼을 지지한다고 하는 기독교인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래서 난 비록 이번 사태에 대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음에도 그들이 마음에 안든다. 기독교의 문화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성경을 근본주의적으로 받아들이는 저런 극렬한 기독교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이상 동성애를 문제로 여기지 않는 사회의 현실속에서 도대체 기독교인은 언제까지 동성애 문제를 죄라고 단정짓고 문제를 회피하기만 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위한 연구와 노력을 기울일 수는 없는건가?


솔까 교회에서 성에 대해 굉장히 경계하는 것 만큼, 성경에는 성에 대한 언급이 초반에 꽤 있다. 특히 구약에서는 여러가지의 성관계에 대해 언급하면서 음란함을 경계하는 구절이 상당히 많은데, 그러한 구절이 많은 맥락에는 단순히 성관계에서 오는 쾌락이나 음란함 때문이 아닌, 우상과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이후 그들이 새롭게 정착할 곳을 가나안으로 정하고 대이동을 한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는 이미 토착종교가 뿌리내려 있었고 그들만의 의식과 예식이 있었다. 그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은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바알'과 '아세라'다. 어쨌든 바알을 섬기는 종교의 의식 중 하나는 바로 성관계를 갖는 것이었는데 이를 위한 남창과 여창이 있을 정도였다. 이런 이유로 가나안 사람들에게 성관계는 쾌락의 요소도 있었겠지만, 성관계 자체가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을 담은 성스러운 행위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가나안에 정착하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성행위 자체가 가나안의 신과 연관된 우상숭배의 행위가 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민감할 수 밖에 없었고, 이와 관련한 성경 구절이 자주 언급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동성애의 행위도 성경에서 언급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생각해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동성애나 성행위의 문란함에 대한 경고는 당시 가나안의 토착종교에 대한 반발과 이를 이스라엘 백성이 섬기고 따르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근데 아직도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나름 자기들 딴에는 어느정도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우리나라의 복음주의자들까지도 동성애는 무조건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유는 근본주의자와 동일하게 성경이 그렇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 뿐이고.


기독교를 믿으면서 동성애를 할 수는 없는건가? 바알 종교는 사라진지 오래다. 오늘날의 성관계는 사랑의 행위지, 그 당시의 바알종교에서 했던 그런 종교적 행위가 아니다. 지금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동성애는 종교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행위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엄청난 시간이 지난 오늘날에도 기독교는 동성애를 저주하며 그들의 행동이 죄라고 자신들의 잣대로 규정하고 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가. 왜 자신들이 생각하는대로 강요를 하고 있는가. 그게 폭력이라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단순히 오물 투척을 한 저런 사람 뿐만이 아니다. 오늘날에 벌어지는 이러한 사태엔 기독교인 모두의 책임이 있다.


기독교는 상식을 갖추는 것도 좋지만, 먼저 자신들의 생각에 깔린 신앙과 교리부터 다시금 점검해보라. 상식만으로 해결될 문제였으면 저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그리고 "동성애는 죄지만, 동성애자는 사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라는 어쭙잖은 인류애를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것도 제발 좀 자제하자. 그걸 마치 자신이 개념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동성애자의 입장에서는 "니가 싫어요." 를 돌려 말한 걸로 밖에 들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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