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이건 흔히 나오던 반응이 다시 한 번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아닌가 싶다. 대한민국의 병역 의무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사람들은 상당히 많다. 국방의 의무야 대부분이 지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 시스템의 부당함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은 대한민국의 특수성을 받아들이고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려는 방향으로 행동하곤 한다. 문제는 이들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고 난 이후다. 국방의 의무를 겪고, 그 시스템이 가져온 개인의 희생에 대한 불만의 표출을 다른 대상에게 퍼붓는 경우가 허다하다. 군대얘기만 나오면 여자는 까인다. 우리가 얼마나 희생과 고생을 했는데, 너네는 우리가 군대갔다 올 시간에 자기개발 하고 있잖아 등의 이야기로. 허나 분명한 것은 여자가 우리보고 자기들 지켜달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나라를 지켜달라고 요구한 것은 국가다. 그리고 이런 개인의 희생을 강요한 주체 역시 국가다.


MC몽은 국방의 의무를 국가의 시스템을 악용해 군대를 합법적(?)으로 피해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결국 유죄를 선고 받았고, 그가 악용한 법은 바뀌었다. 사람들은 MC몽을 죽어라고 까고 있다. 너 때문에 법이 바뀌어서 진심으로 자신의 꿈을 위해 병역을 연기하거나, 아파서 병역의 의무를 다하기 어려운 사람들까지 군대에 가게 생겼다고. 허나 이 시스템을 바꾼 주체는 MC몽이 아니라 국가다. 국가는 그 법이 가지는 사회적인 가치 보다 MC몽의 악용 사례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법을 바꿔버렸다. 이건 사실 국가의 잘못이지 MC몽의 잘못이 아니다. 바뀐 법이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MC몽을 욕할 것이 아니라 국가에 문제를 제기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MC몽만 까기 바쁘다. 이런 현상을 보면 참으로 놀랍다. 국방의 의무라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내면과 의식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게 되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국방의 의무를 시행하는 국가라는 존재에 절대 복종하는 많은 개인을 보고 있노라면 더더욱 무섭고 놀라울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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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봄, 한 낮의 우울)


나는 유년시절을 아버지 없이 보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돈을 버는 소위 기러기 아빠였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일하는 것보다 일본에서 일하는 것이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옳았던 것일까? 98년 IMF가 터지고 많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움츠리는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집은 그 여파를 거의 겪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부유한 것도 아니어서 어머니는 몸이 아팠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하러 다녔다. 아버지가 아셨다면 불같이 화를 냈을 테지만, 어머니는 우리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면서 몰래 일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이 부유하지 않은 집안 살림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알아주는 사람들과 섞이고 싶었던 엄마의 간절함이 일을 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확실히 혼자였다. 아픈 몸을 관리하는 것도, 자식을 돌보는 것도. 집안일을 책임지고 하는 것도 모두 엄마의 몫이었다. 그래서 사실 엄마는 일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상황이 분명했다. 하지만 엄마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어떤 식으로든 집에서 나갈 명분이 필요했던 것 같다. 결국, 엄마는 집에서 가까운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그 때문에 우리(여동생과 나)는 한동안 질려서 토를 할 때까지 저녁을 짜장면만 먹어야 했다. 저녁 늦게 돌아오는 엄마를 기다리며 짜장면을 먹는 시간이 늘어났고 날이 갈수록 짜장면의 면도 불어갔다. 엄마가 없는 집이 불안했고 엄마가 없어서 마음 한 켠이 외로웠지만, 엄마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큼 엄마에게 일은 소중했던 것 같다.


난 엄마에게 좋은 기억이 없다. 엄마에게 사랑받았던 기억도 없고 엄마가 나를 꼭 안아 준 기억도 없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엄마는 나에게 폭력적이고 무서운 존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나를 무자비하게 때렸던 엄마. 침대 구석에 몰아넣고 발로 밟았던 엄마. 체중계를 들고 몇 시간을 서 있게 한 엄마.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체벌했던 엄마. 파리채가 부러지도록 종아리를 때렸던 엄마. 오락을 좋아하는 나의 손을 잘라버리겠다면서 도마 위에 내 손을 올려놓고 칼을 들이댔던 엄마로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나는 혼자 살면서 건강을 챙기고 우리를 감당해야 했던 엄마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스트레스가 나에게 향한 결과라고, 저 사건을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여동생은 때리지 않고 유독 나만 맞았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나도 참 말 안듣는 아들놈이긴 했다.)


그렇게 살던 엄마가 어느 날부터 집에 남자를 들이기 시작했다. 우리 집 빌라 지하에 살던 이웃과 친했던 남자. 그 남자와 엄마는 우리와 함께 놀이공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방학 때마다 아버지가 계신 일본에 가서 디즈니랜드에 놀러 갔었던 그런 시간을 그 남자와 보냈고, 남자는 엄마와 친해졌으며 같이 술을 먹기도 했다. 그리고 남자는 우리 집에 와서 잠까지 잤다. 엄마가 즐거웠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남자가 우리와 만나는 빈도수가 늘어났고 집에 오는 일도 잦아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귀국한 아버지. 그리고 어느 날 밤, 잠에서 깨어 보니 아버지는 엄마를 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나에게 엄마의 존재는 사라졌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같이 일하던 중국 여자와 바로 재혼을 했다. 하지만 나는 그 날부터 지금까지 새엄마라는 존재를 엄마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내 유년시절의 모든 것을 차지하고 있던 엄마의 존재를 빼앗긴 것 같은 느낌에 아버지를 증오했고 새엄마라는 존재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정확히는 증오는 다 빠져나가고 뭐 그래 자기네들 인생인데 뭐? 라는 체념정도로 바뀌었달까?


난 지금도 엄마와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혼 이후에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이 다 모여 그때의 이야기를 하면서 오해를 풀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고, 어떻게든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지의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 그때 왜 그랬었냐며 엄마와 아빠에게 따져 묻기도 했다. 하지만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도 엄마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친한 동생이 보러 가자고 하여 내용이 뭔지도 모른 채 가서 봤다가 기분이 묘해진 저 연극. 클라이막스에 꺽꺽거리며 우는 사람들의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없어서 더욱 불편했던 그 연극. 그들은 어디에서 울었던 것일까? 딸을 잃고 정신적으로 의지할 곳도 없이 집안일만 하면서 바람난 남편을 기다렸던 부인이 결국에 남편 앞에서 자살을 이야기할 때? 부인이 남편의 여자 이야기를 계속 물으며 자신과의 존재를 비교할 때? 잃어버린 딸이 죽었으나 곁에 살아있다고 믿으며 행동할 때? 자살하면서도 남편의 건강과 안위를 걱정할 때? 글쎄. 잘 모르겠다.


부모 된 입장이라면 뭔가 다른 느낌이 올 것 같지만, 그럼에도 저 연극이 공감되고 이해된다면 사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차라리 조울에 가까운 감정 기복이 난무한다고 평가하는 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 연극을 보고 운다는 것은 저러한 부인과 저러한 가족이 꽤 존재한다는 것이고, 누군가는 또 그런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것일 테니까. 저 끔찍하여 도저히 정상적으로는 살 수 없는 삶을. 그래서 저 연극을 보고 우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고, 저 삶을 나는 이해하지 못 울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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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성

단상/종교 2014. 10. 8. 17:28

교회에서 성이라는 것은 참 다뤄지지 않는 주제이다. 나도 교회를 다녔었지만, 교회에서 성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지 모르겠다. 물론 이성교제 강의라는 뻔한 내용의 이야기들은 가끔 이루어진다. 성인이 되고 대학생활을 막 시작한 청년들에게 단연 이성교제는 최대의 관심사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주기적으로 이성교제와 관련한 강의는 하게 된다. 하지만 몇 년 그 강의를 듣고 나면 바보라도 알게 된다. 기독교가 성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말이다.


3말4초라는 말을 아는가? 사실 이 용어가 종교단체에서만 사용되는 것은 아니라고 알고 있지만, 특정 종교단체에서는 굉장히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3말4초. 즉, 3학년 말에서 4학년 초에 연애를 시작하라는 지침같은 것이다. 왜 굳이 3학년 말에서 4학년 초인가? 그 시기가 그나마 인격적으로 성숙하여 사랑할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가 이 시기에 성숙해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저 말은 사실 종교단체가 가지는 이성교제의 생각에 대한 상징적인 단어다. 즉, 성숙할 때 연애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성숙은 사랑할 준비가 된 어느 시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결혼과 연결된다. 결국 저 말은 결혼할 준비가 된 사람들만 사랑하라는 어떤 암묵적인 용어다.


이걸 개소리라고 할 신앙인도 있을 수 있겠지만, 현실이 그렇다. 개신교는 결혼 이전의 어떠한 스킨십이나 성관계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이 주장하는 올바른 성관계와 연인의 모습은 오로지 결혼이라는 제도와 하나님의 허락안에서만 완전해진다. 그 외 나머지는 다 음욕이며, 음란이고 죄가 된다. 아 물론 이성교제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연애? 결혼을 전제하지 않고도 분명 가능하다. 하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그 연애속에서 성적인 요소를 제거하라고 압박한다. 결혼을 약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성적인 모든 행위는 죄악된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현실이다. 누구든 사랑을 하면 연인의 몸을 만지고 싶고 같이 자고 싶다. 허나 교회는 절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현실과의 커다란 괴리가 발생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과 자고싶은 마음은 너무 자연스럽다. 그 사람을 만지고 싶고, 보고 싶고, 냄새맡고 싶고. 이런 마음은 사랑하면 할 수록 점점 커진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죄'라는 이름이 사랑을 하고 있는 신자들을 압박한다. 신자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그리고 누군가는 상대방을 좋아하여 생긴 이런 감정을 철저하게 부정하기도 한다. 자신의 사랑을 더럽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끊어내고자 애쓴다.


그들은 최대한 연애를 미루라고 권한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던가? 같은 공간에서 아픔을 나누고 함께 활동하고 시간을 보내면, 사랑이 싹트고 정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과정속에서 서로의 모든 것을 원하는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다. 허나 그들은 이것이 죄악의 길로 들어가는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도 사랑의 과정에서 서로를 원하는 감정이 섹스로 이어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무슨 죄인가? 허나 이 감정이 절정에 다다른 결과가 섹스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연애를 하는 것을 두렵게 한다. 그래서 결국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연애를 일정기간 포기하는 것이다. 시기가 아니라는 말로 말이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그게 맘대로 되나?


이런 상황에서 신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없다. 믿음을 포기하든지, 자신의 사랑하는 감정을 어떤식으로든 억누르든지, 아니면 감추고 가든지. 허나 어느 것도 교회에 득이 되지 않는 선택지다. 믿음을 포기하는 것은 결국 교회를 떠나는 것이고, 사랑하는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자신의 좋아하는 감정을 스스로 왜곡하는 것이며, 사랑하는 현실을 감추는 것은 자신만의 은밀한 영역을 만들어 신앙과 분리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신자의 고통과 수치심을 유발한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공동체는 신자들의 성문제에 대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공간이 되어버린다. 신자들은 자신들의 성을 토로할 수 없다. 결혼이라는 약속이 없는 모든 성에 대해 죄라는 딱지를 붙인 공간은 더 이상 신자들의 성 문제를 보듬어주지 않는다. 거기엔 자비도 관심도 없다. 성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냉정한 심판의 칼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몇일전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사건을 다룬 숨바꼭질이라는 책을 다 읽었다. 숨바꼭질은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 사건을 통해 한국교회가 처한 문제의 본질을 끄집어내고자 했다. 책의 분석은 꽤나 날카로웠고 구구절절 맞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책을 읽고 나는 뭔가 빠졌다는 생각을 했다. 그 책은 교회라는 공간이 성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 전병욱 목사의 사건이 지금까지도 해결이 되지 못한 것에는 피해자들의 적극적인 대처가 없었던 것이 상당히 크다. 피해자들은 목사를 고소하지도 못했고, 주변사람들에게 피해사실을 말하지도 못했다. 오랫동안 아픔과 삶을 나누는 팀원들이 아주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 문제를 단순히 교회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과 성공한 목회자의 높디높은 권위라는 측면으로만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다. 이 책은 피해자들의 수치심의 측면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끊임없이 성에 대해 거룩함을 강요받은 신자가 교회라는 공간에서 당한 성추행으로 인해 발생한 수치심은 일반적인 성적 수치심보다 그 강도가 더 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성이라는 것 자체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교회의 문화속에서, 그들은 성적인 범죄사실 자체를 누구에도 말할 수 없는 그런 압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전병욱 목사의 성추행사건은 끝끝내 당사자가 아닌 당사자의 지인과 제 3자에 의해서 드러났다. 당사자들 중 어느누구도 직접적으로 행동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못한 것에는 결혼 이외의 성에 대해 죄악됨으로 취급하는 한국교회의 성 가치관이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고 난 생각한다.


교회가 성적으로 건강해지려면 분명 성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물론 난 이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다. 교회가 미쳐서 성경을 다른 기조로 해석하지 않는 이상, 성에 대한 기독교의 단호함은 앞으로도 계속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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